윤정선은 기억 속의 공간을 그린다. 작가의 기억으로 재구성된 작품 속 공간은 실제 존재하는 곳이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사람과 주변 환경을 소거하고, 작가는 비밀 일기처럼 그 공간 속 자신만의 순간들을 기록하고 있다.
대학을 졸업한 2000년대 초반, 윤정선의 작업은 대부분 무채색이었다. 회색빛 영국의 하늘과 중국 거리에 작가는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마치 이방인처럼 머무르며 자신의 색이 섞이지 못하는 외로움을 그림으로 그렸다. 북경 유학 이후 작품 속 거리에 붉은 색, 노란 색, 파란 색과 같은 원색을 사용한 오브제가 등장했다. 사람이 없는 공간 속 원색의 오브제는 그 공간을 오랫동안 기억하는 존재였다. 작가에게 큰 전환점이 된 것은 북경 시리즈이다. 자금성 지붕 위 화려한 금박, 붉은 벽과 문은 모두 작가에게 낯선 색이었다. 이 색을 통해 작가는 청조의 쓸쓸한 마지막과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 그리고 오늘날의 방문객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엠볼리움은 작가의 야경 시리즈를 대표하는 작품 중의 하나이다. 명동성당 사도회관의 밤, 자욱한 어둠 속 건물 앞에 조명이 빛나고 있다. 바닥에 반사되는 빛은 보라, 분홍, 파랑 등 색깔에 그날 작가의 감정이 담겨 반짝거린다. 어두운 건물과 빛에 반사되어 더 밝게 빛나는 바닥이 만들어내는 콘트라스트가 돋보인다. 오늘과 내일 사이에 자리한 밤은 마치 극 사이에 끼어든 막간극(엠볼리움)처럼 일상에서 분리된 시간이다. 이 순간에 집중한 작업을 통해 작가는 작가로서의 삶을 되돌아보고 작품과 작가의 관계, 화가로서의 삶을 치열하게 고민했다.
서울로 돌아온 작가는 익선동과 삼청동을 그렸다. 익선동과 삼청동은 서울을 대표하는 주거지였다. 특히 익선동은 일제 강점기에 한옥을 일본식으로 바꾸어서 거주지로 사용한 역사적인 아픔이 묻어있는 곳이다. 일본식의 타일 담장과 한옥 지붕이 있었던 삶의 거리는 최근 상업 지구로서 변모했다. 그 시절의 길목은 사라졌지만 일부의 남아있는 벽으로 그 흔적을 가늠할 수 있었다.
작가는 이 시점부터 남아있는 것에 대해서 고민했다. 자신에게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것, 자신을 지켜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며 부모님과 고향 서울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익선동은 남아 있는 것, 남아 있을 것을 찾으며 기록하는 작가의 발걸음이 무색하게 빠르게 변화했고, 결국 이제 모든 것이 바뀐 거리에는 지붕만이 남았다.
그리고 이번 신작에서 작가는 덕수궁을 그렸다. 덕수궁은 대한제국기 황실의 마지막 궁궐이면서 동시에 서양 건축과 문물이 공존하는 독특한 장소이다. 한옥 사이에 들어선 석조전의 당당하고 이국적인 모습 너머에는 주권을 잃은 나라의 슬픔이 존재한다. 고종은 이곳에서 공사들과 가배를 마시며 나라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때론 좌절했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윤정선에게 이곳은 어린 시절 뛰어놀았던 곳이 되었다. 그녀는 덕수궁 뜰을 날아다니던 공작새와 국전의 아름다운 전시를 기억하고 있다. 미술대회에서 석조전 앞 분수대를 그리면서 윤정선은 화가로서의 꿈을 키웠다.
덕수궁은 외국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작가 내면의 본질을 간직한 윤정선 자신의 모습과 닮았다. 작가 윤정선이 시작된 공간이면서 동시에 유년기가 숨 쉬는 이 공간은 다채로운 색으로 표현된다. 이 색의 향연 속에서 작가는 자신의 많은 시간들을 되돌아보며 기억 속을 걷고 있다. 윤정선 작가의 개인적인 삶이 담긴 공간은 우리 모두의 공공의 공간으로, 서울의 발자취를 간직한 역사적 기록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