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부한 표정과 귀여운 몸짓을 한 베들링턴 테리어 강아지 룽키가 등장하는 채혜선의 작품은 언뜻 보면 행복하기만 한 동화 속 세상을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바람 빠진 풍선을 끌고 가는 모습이나, 다이빙할 채비를 마치고 나와 물속으로 뛰어들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모습, 혹은 화려한 고깔모자를 쓰고 사료뿐인 생일상을 받은 모습을 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채혜선 작가는 반려견 룽키의 시선으로 보는 일상의 감정, 생각을 일기를 쓰듯 그림으로 기록한다. 작가가 아닌, 반려견이 보는 세상을 그리는 이유는 가장 사랑하는 존재로 작가의 마음을 표현해 보는 것도 있지만, 작가와 성격적으로 비슷한 룽키를 통해 작가 자신을 보기 때문이다. 룽키는 곧 작가의 페르소나이다.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자작나무 숲은 이상을 향해 고고하고 우아하게 뻗은 모습으로 겁이 많고 소심한 룽키가 매일 만나는 큰 세상을 의미한다. 이곳에서 룽키는 자연의 친구들을 만나고 풍선과 솜사탕 등을 건네며 관계를 형성한다. 채혜선의 작품에서 풍선, 롤리팝, 솜사탕은 희망과 실망을 동시에 나타내며, 빛과 어둠처럼 필수불가결의 양면성을 나타내는 요소이다. 관객들은 빵빵한 풍선을 내미는 룽키에게서 설렘을 보지만 바람 빠진 풍선을 끌고 돌아가는 모습에서는 측은지심을 느낀다. 어쩐지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만 같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때로는 원대한 꿈을 꾸며 좋은 일이 생기기를 희망한다. 꿈속 룽키처럼 어느 날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우주인이 되기도 하고,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슈퍼맨이 되기도 한다. 생일이 되면 뭔가 특별한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대감에 차오르지만, 우리가 맞는 대부분의 생일은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또 다른 하루일 뿐이다.
미국의 팝아트 작가 제스퍼 존스는 ‘회화란 존재하는 그 무엇이나 일상을 새롭게 보도록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새로울 것 없는 현상도 작품을 통해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채혜선은 기대와 낙심이 공존하는 일상의 모습을 룽키의 눈을 빌러 작품으로 따뜻하게 담아내었다. 거창할 것 같은 삶의 의미 또한 평범한 일상과 우리 곁을 지키는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 있지 않을까? 채혜선의 작품을 통해 일상의 새로운 면을 발견할 수 있길 희망한다.
채혜선 작가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과를 졸업하였다. 그는 2016년 갤러리 이즈를 시작으로 영은미술관, 반얀트리 호텔에서 8번의 개인전을 개최하였고, 예술의전당, 진산 갤러리 등에서 15회의 그룹전, 홍콩, 스페인 등지에서 다수의 아트페어에 참여하였다. KT&G, 행정안전부, 국회도서관 등 유수의 기관이 작품 소장을 하고 있으며, 현재 영은미술관 레지던시 작가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